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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의 궁전을 조성할 때에도, 보드나트 사원을 축조할 때에도 당시 사람들은 기계를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축조할 때에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스리랑카의 불교유적들도 사람이나 동물의 힘을 빌려 조성했을 것이다. 이번 지누단다 롯지의 공사현장에서 톱으로 나무를 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이 오브랩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톱질을 하고 있다.

카트만두 타멜거리의 공사현장에서도 사람의 힘을 활용해 드릴로 땅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한 번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땀을 쏟아 지금은 역사적 유물이 된 건조물을 축조할 때에도 역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의 힘으로 땅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지프차를 타고 가다 산중의 도로건설현장에서 망치로 돌을 깨고 괭이와 삽으로 공사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도 역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간간이 포크레인과 같은 중장비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은 네팔에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에도, 동티모르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러한 모습들이 종종 목격되곤 했다. 철도, 도로, 항만 등 국가적 인프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네팔, 동티모르, 스리랑카 등 재정이 열악한 국가에서는 막대한 재정을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카트만두 보드나트 불교사원에서 만난 네팔의 개

카트만두  보드나트 불교사원에서 만난 네팔의 개팔자는 그야말로 상팔자로 보였다. 사람이 지나다녀도, 자동차 크략송 소리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늘 불교사원에서 생활하다보니 개들도 성불을 한 것일까? 네팔에서 만난 개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삶을 초월한 듯했다. 그런데 보드나트 불교사원에서 만난 위 개의 포즈는 단연 압권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 복잡하게 얽힌 전선

카트만두와 포카라 시내에서 만난 복잡한 전선의 모습이다. 질서야 분명 있겠지만 저것을 관리하는 기사들의 능력을 상상하니 사뭇 경이롭기까지 했다. 만약에 화재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엉킨 ㅂ복잡한 카트만두의 거리

카트만두와 포카라 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 이랬다. 건널목도 중앙분리대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네팔의 번잡한 도시의 도로 모습이 이랬다. 간간이 교통경찰도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긴 했다. 그러나 네팔에 머무는 동안 교통사고가 발생해 운전자들끼리 옥신각신 다투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 운전자의 능력 또한 발군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

더르바르광장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왕궁들도, 보드나트 불교사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거의 방치되다시피한 네팔 유적지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힌다. 예전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에도,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런 모습이 안타까왔는데, 네팔의 역사적 유물관리는 더 엉성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시민들이 역사적 유물 위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조그만 틈새라도 있는 곳이면 상인들이 물건들을 진열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부에 조성된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통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지진으로 붕괴된 네팔의 더르바르 왕궁의 복원에 중국이 재정지원을 했는지 중국의 재정지원 표지판이 문화재 복원 현장에 붙어 있었다. 스리랑카나 동티모르와 같이 재정이 빈약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중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항만이나 도로공사가 진행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는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려는 중국의 국가전략인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 一帶一路)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의 대외노선에 대한 구상이자 비전인 이 정책에서, 일대(一帶)는 여러 지역들이 통합된 '하나의 지대(one belt)'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뜻하고, 일로(一路)는 '하나의 길(one road)'을 가리키는데, 이는 동남아시아-서남아시아-유럽-아프리카로 이어지는 '21세기 해양 실크로드'를 말한다.

중국이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 항만 건설이나 도로건설, 네팔의 도로건설이나 문화재 복원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은 중국의 이상과 같은 국가전략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중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일대일로 사업에 참가한 스리랑카와 같은 국가들이 회복하기 힘든 위기에 봉착했다는 소식이 종종 뉴스에 보도되기도 한다.
 
스리랑카는 2000년대에 내전을 끝내고 국가 재건을 위해 경제개발을 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가 있었지만, 해외 투자자들로서는 이런 나라에 투자를 하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안아야 했기에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리랑카는 경제개발을 위해 자연스럽게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국가전략은 자신이 재정을 투자한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국가이익이 우선이었기에 참여한 국가를 피폐화시키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해당 국가들은 국가의 기반 시설들을 중국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보드나트 불교사원 인근의 네팔 공중화장실
네팔 공중화장실

위 사진은 카트만두 보드나트 불교사원 인근에서 만난 네팔의 유료 공중화장실 벽면에 쓰인 글씨다. 긴 것은 10루피, 짧은 것은 5루피다. 몇 년 전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3유로를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요금도 비쌀 뿐만 아니라 화장실 이용이 무척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화장실 문화는 대한민국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네팔의 화장실은 별도의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의 60년대 시골 버스정류장의 공중화장실과 비슷했다. 하지만 급하면 돈을 내고서라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화장실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다시 방문하게 될 때에는 네팔의 화장실 환경도 많이 바뀔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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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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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소수민족인 구룽족의 마을 향자곳을 가기 전 포카라 시내 푸줏간에서 염소갈비를 샀다.

 

가격표. 우리가 산 염소갈비는 1kg에 1300루피(한화로 13,000원)였다. 위 9처럼 생긴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 1이다.

 

네팔 포카라 생선가게

 

포카라 생선가게

 

생선가게

지난 12월 29일 포카라의 산악지대에 있는 네팔 소수민족인 구룽족(몽골리안)이 사는 향자곳에서 홈스테이를 떠나기 전 포카레 시내에서 푸줏간에 들러 염소갈비 3kg을 구입했다. 향자곳 홈스테이를 할 집에서는 저녁 식사를 염소갈비찜을 만들어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들렀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 무렵이어서, 푸줏간 주인은 식사 중이었다. 안쪽 긴 의자에 앉아서 오른손으로 비벼서 식사 중이었다. 아마도 달밧인 듯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가게 주인이 식사 중이었다고 해도 먼저 손님이 필요로 하는 주문을 받아 물건을 팔고 난 후 다시 식사를 하거나 할 텐데, 푸줏간 주인은 손님이 와도 전혀 게의치 않고 자신이 하던 식사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우리의 주문을 받았다. 그게 우리와의 문화 차이인 듯 싶었다. 아마도 점심 시간이니 푸줏간 주인의 태도가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도 식사 중일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푸줏간 옆에는 생선가게가 몇 군데 있었다.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네팔은 바다를 접하지 않은 내륙 국가이니 생선은 주로 호수 등에서 잡은 민물고기 같았다. 비릿내도 심했다. 물론 인도 등으로부터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를 수입할 수도 있겠지만, 진열된 생선이나 수조에서 헤엄치는 물로기들은 주로 민물고기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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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과 기념촬영
아유르베다 2명의 의사와 정흥식 원장
인터뷰
대기 중인 환자들
독소를 뽑는데 활용된다는 거머리
거머리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왔다.
 
기원전 6세기 수슈루타가 그전에 말로 전해져오던 인도의 전통 의학과 고대 힌두교의 전통 의학을 집대성해서 쓴 의학서. Ayurveda는 산스크리트어 시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어휘인데 어원적으로는 आयुस् (아유스, 맥락에 따라 생명력이나 인생 혹은 장수를 의미하기도 한다.)와 वेद (베다, 지식을 의미한다. 리그베다 위키의 베다가 바로 이것이다)의 합성어이다. 다만 힌디어에서 흔히 '민간요법'으로도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다. 즉, 믿는 사람은 믿지만 인도인 중에서 현대 의학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야매이다.

그러나 역사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수슈루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의로서 당시 사람들을 어떻게든 치료하기 위해 당시의 경험과 지식을 집대성한 것이다. 의학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기 이전의 사람들에겐 이것이 사실상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의학서이기도 했다. 힌디어에 민간요법이라는 뜻인 일반명사처럼 된 것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누군가가 아프면 이 의학서부터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매취급받는다지만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만성질환에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졌는데, 아유르베다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 그대로 베다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연원을 따지자면 약 5천 년 동안 인도에서 일상생활에 활용된 셈. 아유르베다는 개인의 신체, 정신, 영적인 기운의 상호 균형이 깨졌거나, 혹은 개인과 자연 환경의 균형이 깨졌을 때 질병이 생긴다고 여긴다.

이러한 아유르베다가 표방하는 철학은 한의학과 공통점이 있다. 한의학의 오행에는 목, 화, 금, 토, 수가 있는데, 아유르베다는 에테르, 공기, 불, 물, 흙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이론의 바탕이다. 또한 한의학에서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분류하는데, 아유르베다에서는 Vita(공기와 허공), Pitta(불과 물), Kapha(물과 흙) 총 3가지 체질로 구분한다. 이 체질론은 범문화적으로 중세 이전까지 흔히 나타나는 체계이다. 서양의학도 9세기 전까지는 히포크라테스가 주창한 사체액설을 따랐다. 티베트 의학의 체질론도 아유르베드의 영향을 받았다.

외과시술도 생각보다 발달되어 있다. 고대 인도에서 이미 기원전에 성형수술이 집도될 정도였는데, 이러한 성형수술 기법이 서양으로 전해져서 현대 성형수술의 기원이 될 정도였고, 편도선 절제술과 백내장 수술도 시행되었다.

오랜 전통을 이어오는 만큼 아유르베다 요법 중에는 현대의 기준에서 안전성이 의심되는 요법들이 많다. 사혈, 구토 유발과 같은 요법이 있는데, 이러한 요법은 오히려 인체에 해롭다. 또한 납 같은 중금속이 함유된 처방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아유르베다 품목 수입을 금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아유르베다 시술자들은 사혈, 구토 유발 등을 권하는 경향이 크게 사라졌으며, 예컨대 사혈을 해야 하는 증상이라면 헌혈을 적극 권장하는 것으로 대체한 경우가 많다.

다만 여러 질병을 어떻게든 치료를 해야만 했던 수슈루타 입장에서는 갖은 수단을 다 이용했어야만 했고 그것이 어느정도 환자의 병증을 완화시키는데 효과가 있었거나 심리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용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부 의학요법은 현대와 같은 의학 도구들이 없는 상황에선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로결석은 인간뿐 아니라 야생동물에게도 생기는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질병인데 이집트, 그리스와 같은 서구권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라리 죽여달라는 환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끔찍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요도를 절개하거나 쇠꼬챙이를 삽입해 결석을 빼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수슈루타는 직장을 통해 방광과 결석을 하복부쪽으로 압박하여 복부를 일부 절개해 결석만을 빼내는 방법을 최초로 시도한 기록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러한 치료요법으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아무튼 근대에 영국이 인도 전역을 정복하면서 아유르베다 의학의 유용성과 과학성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었고, 이 과정에서 아유르베다 의학에서 신비성을 강조하는 시술이 크게 줄고, 현대 약리학과 어느정도 융합되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당국이 시골 방방곳곳에 병원을 세우려는 노력에 매우 소흘히 했고, 그 결과 시골에서는 여전히 아유르베다가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늘날에도 인도, 네팔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는 아유르베다 의원이 매우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현대 의학기술로도 안 되면 아유르베다로 치료를 하는 경우도 많다. 해당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현대의학 인프라가 매우 열악하고, 따라서 돈 없는 서민들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대의학 대신 그들 나름대로 수백 년간 경험이 축적된 민간요법에 기대게 되는 것. 실제로 수슈루타가 집대성한 치료 요법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거기에 덧붙여서 민간 요법을 확대하고 발전시킨 것이 있어서, 낯선 현대의학보다도 경험과 구전을 통한 아유르베다에 더 의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유르베다는 서방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대표적으로 디펙 초프라는 인도 출신의 의사로서 아유르베다 의학을 접목한 대체의학자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적으나, 국내 거주 인도인들 때문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인도 컨셉의 스파 제품 같은 데서 자주 써먹는 편. 또한 비교적 최근에는 영양제 해외직구가 유행하면서, 일찍이 아유르베다에 언급된 약초들을 영양제로 소비하던 서양의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어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대표적으로 아슈와간다 같은 물건으로, 아답토젠(Adaptogen)이라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것들이 유행하기도 했다.

☆ 이번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동행한 정흥식 원장이 네팔의 아유르베다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지난 12월 31일 오전에 카트만두에 있는 네팔 국립 아유르베다 병원을 방문해서 병원 의사 2명과 궁금한 사항에 관해 인터뷰를 했다. 제이빌 홈사장이 통역을 담당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고, 치료를 위해 대기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제3세계의 의료현실이라 그런지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병원의 환경이 깔끔하게 정돈되고 또 깨끗해야 믿음이 갈 텐데, 문외한인 이방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여하튼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위안을 얻어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했지만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 설명해 준 2명의 의사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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